이것은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과 마주하면서 생기는 '설렘'에 관한 단상이다. 신문 사회면에 간간이 다뤄지는 사건들이 화두를 던져줬지만 그 개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나를 포함한 일반적인, 일상적인 중년 아저씨 관찰기다. (물론, 중년 여성에게는 그 시기의 비슷한 욕구가 있겠지만 여성이 아닌 나는, 더 섬세하고 직관적인 그녀들의 정서를 설명할 재간이 없다.)
젊은 여성과 관계의 '진전'을 통해 설렘을 경험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화재의 소설 <롤리타>에서부터 <데미지>나 <연인> 같은 영화. 그리고 매일 보게 되는 포탈 뉴스에서, 직장에서, 지인들을 통해서도 비슷한 이야기 하나둘은 일상적으로 듣게 된다. 흥미롭게도 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중년 남성의 대부분이, 참 평범한 사람들이란 느낌을 자주 받는다. 다시 말해, 여자를 특별히 밝힌다거나 평소에 '업소'에 드나든다거나 저질스런 농담을 일삼았던 부류로 한정되지 않더라는 말이다.
대체로 포탈에서 기사화되는 사건에서 문제의 남성을 변태로 치부하거나 가정 있는 남자의 파렴치한 일탈 내지는 욕정으로 치부하나, 나는 많은 경우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중년 남자의 복잡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변 다수의 여성들은 '아빠 오빠' 빼고 모든 남성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너무 일반화 같다. 아무튼 나는 앞서 말한 것을 '평범한 중년 남성의 복잡한 욕구'라고 정의하려고 한다.
크게 회자된 신정아의 <4001>을 보면서도 느꼈고 한때 언론에 다뤄진 고위 공직자들의 내밀한 문자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만난 젊은 여성에게 흔들리는 중년 남성의 욕망은 크게 세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물론 '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젊은 여성의 몸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세상은 마치 모든 남성이 노년까지 사춘기 시절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치부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물론 성범죄의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인 마당에, 남성인 내가 다수의 남성을 비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욕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저, 주변 남자들도 봐도 그렇고 '몸'에 대한 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젊음'에 관한 것이다. 많은 중년, 나아가 노년의 남성들도 마음만은 젊은 줄 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심정적으로 비슷하게 여기는 이십 대 여성이 '아저씨'라고 부를 때, 사회에서 친구처럼 대하고픈 여성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많은 '중년 피터팬들'은 마음속 지옥을 경험한다. 주고받은 대화나 문자에서 젊은 여성이 허울 없이 대할 때, 서로 반말을 주고받거나 친구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중년 남성은 '설렌다'. 강헌 선생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젊음'에 대한 욕망이 '몸'에 대한 욕망보다 크다"에 내 오른팔을 건다.
마지막은 '도와주고 싶은' 욕구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여성에 비해 남성은 존경받고 싶은 욕구, 도와주고 나서 고맙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나는 이것이 사회적 지위 상승 욕망이 높은 젊은 여성과, 도와주고 존경을 얻고 싶은 중년 남성의 니즈가 통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소림사에 갓 들어온 동자승, '키다리 아저씨', 사조수 관계 등 남성은 자신이 미숙한 어떤 존재를 다듬어가는 과정, 성장 내러티브에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 분명 있다. 가르치면서 통제하려는 욕구, 그것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말이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모범생으로 커온 평범한 남성들의 일상적인 욕구의 자제, 직장생활에서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의 스트레스, 표현의 억압 등의 이슈들이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충분히 다뤄졌으므로 말을 더 보태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나는 '평범한 중년 남성의 복잡한 욕구'라고 설명한, 이 '설렘' 현상에 대해 그 정서 자체를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것보다는, 스스로가 본인의 욕구 자체를 잘 인지하는 것이 오히려 내면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일단 자신에게 인지된 '설렘'은 자연스럽게 욕망의 본질에서 빗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지하게 된 복잡한 욕망은 그 감정, 행동의 방향성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게 만들므로 그 설렘의 최종 책임을 지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뉴스와 신문에서 우리가 매일 삿대질하는 이들처럼, 그 상황과 본인의 내면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문득,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잠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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