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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IT에세이

[제이언니의 IT에세이(11)] '관리자' 없는 회사, 가능할까

"알파고는 완벽했습니다."
"무결점이고 감정적 변화 또한 없었습니다."

 

지난 5월 27일 중국 우전컨벤션센터에서 벌인 커제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직후 커제가 내뱉은 말이었다. 중국랭킹 1위인 커제 9단은 지난해 3월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5번기를 벌일 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겨도 나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1, 2국을 연달아 패한 뒤 3국 후반에는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알파고(AlphaGo)는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으로 딥마인드가 

2014년 구글에 인수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여 2015~2016년 프로토타입 단계를 거쳐 2017년 완료되었다. 2016년에는 한국의 이세돌과 의 대국에서 4승 1패를 기록했고 올해 커제와 대국에서 3전 전승을 이루었다.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 CEO는 이번 대회가 알파고가 참가하는 마지막 경기라고 말했다는데, 알파고는 그야말로 2년만에 인공지능이 인간 고수들을 무너뜨리고 홀연히 떠난 사례로 남게됐다.

 

바둑계에서 알파고의 승리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단순반복작업이나 간단한 게임이 아닌, 바둑처럼 경우의 수가 많은 복잡한 경기에서는 인간이 컴퓨터의 계산능력 이상의 직관력, 보다 높은 수준의 창의적 접근, 상황대처능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참패에 가까운 인간의 패배였다. 컴퓨터는 이미 수십 수 이상을 수백가지의 가능성을 검토(연산)하며 흔들림없이 정확한 수로 경기를 지배했다. 이대로라면 바둑 뿐 아니라 흔히 인간 고도의 정신노동으로 분류되는 업무, 즉 회계사나 기자, 변호사의 일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 알파고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있지만, 사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내용은 인공지능이나 알파고가 아니라, 요즘 소위 뜨고 있는 '홀라크라시(Holacracy)'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가지기 때문에 알파고를 언급했지만 일단은 홀라크라시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해야할 듯 하다.

 

그렇다면 홀라크라시란 무엇일까. 홀라크라시는 '전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holos와 '통치'를 뜻하는 cracy가 합쳐진 말로, 권한과 의사결정이 상위 계급에 속하는 게 아닌 조직 전체에 걸쳐 분배되어 있는 조직 형태를 의미한다. 번역하자면 '자율 경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최근 국내에 홀라크라시의 창시자인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책이 번역되어 더욱더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 관심의 중심에는 보스나 관리자가 없는 조직에 대한 당혹감, 놀라움, 나아가 일말의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책에서도 언급하듯, 이미 자포스(Zappos)라는 기업이 홀라크라시를 도입하여 성공한 대표기업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전세계의 약 1000개의 기업이 홀라크라시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홀라크라시의 부정적인 면도 있다. 처음 홀라크라시를 도입한 기업의 20%가 원래의 경영 체제로 돌아갔다고 하며, 자포스도 초기에 홀라크라시를 도입하겠다고 하자 직원 중 14% 가량의 직원이 퇴사를 하는 진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경영'이라는 화두를 던져준 홀라크라시 시스템은 당분간 경영과  IT, 나아가 자기계발 분야에 핫 이슈가 될 것 같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조직 구조의 폐해를 경험한 많은 직장인들, 유능한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고 서열과 '라인'에 따라 조직 생활의 희비가 엇갈리는 우리 조직 문화 안에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보스도 매니저도 없는 일터라니.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홀라크라시. 흐름출판

홀라크라시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조직에서 어떤 변화를 이끄는지를 보다 디테일하게 알고 싶다면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쓴 본서를 보다 자세히 읽으면 될 것 같으므로, 대신 나는 이 글에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 시스템에 대한 사견을 조금더 늘어놓으려고 한다.

 

홀라크라시는 헌장(constitution)으로 불리는 엄격한 룰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본 대목은 홀라크라시 시스템을 정의하는데 데이빗 알렌의 도움이 컸다는 언급이었다. 데이빗 알렌은 GTD(Getting Things Done)이라는 일정관리 방법으로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저자이다. GTD방식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이미 수많은 플래너와 일정관리앱의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명의 책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과 더불어 자기계발서의 바이블처럼 언급되곤 한다.

 

내 생각에는 홀라크라시를 이해하는데 GTD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내 얘길 조금 하자면,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일정관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즈음에 프랭클린 플래너를 알게됐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자연스럽게 그 툴의 철학이 되는 '성공하는 7가지 습관'을 알려줬고 나는 저자(스티븐 코비)가 정의한 프랭클린 플래너의 법칙대로 일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프랭클린 플래너를 제대로 사용하기까지 몇 달 정도가 걸렸지만 나는 이 방식이 꽤 유용하다고 생각해서 주변 회사 동료들에게 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상당수의 지인들은 관심이 없었고, 내 감언이설에 속아 플래너를 구입한 사람들조차 결국엔 그 방식대로 일정을 정리하는 것을 피곤해했다.

 

시간이 흘러, 프랭클린 플래너라는 일정관리 툴의 맹점이 보일 무렵 데이빗 알렌의 GTD라는 새로운 일정관리 방식을 접하게 됐다. GTD방식은 처음 접할 때 프랭클린 플래너보다 3-4배는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프랭클린 플래너와 GTD는 둘다 일정을 관리하는 도구이지만 서로 지향점이 확연이 달랐다. 그 차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프랭클린 플래너의 일정관리 개념의 핵심은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이다. 직장에서 실무를 하다보면 당장 꺼야할 현안의 불들에 휩싸여 살다보면 지금은 급하지는 않지만 내 조직에게 혹은 개인에게 보다 크고 중요한 일들을 준비하는 데에 싸야할 시간을 낭비하게 되므로 미래를 위해,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그 시간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개념을 일정관리 도구에 정의한 것이다.

 

반면 GTD방식은 '우선순위'의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생각하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정작 내 발목을 잡는 일들이 얼마나 잦은가. 퇴근길에 아이 분유를 사다 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잊었다가 일주일 내내 부부관계는 물론 직장에서도 저기압으로 지내야 했던 기억, 혹은 간단한 메일 보내기를 잊어서 중요한 회의가 취소되거나 회의 당일에 회의실 예약을 미루다가 정작 제시간에 회의를 시작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데이빗 알렌은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보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나누는 것보다 내가 처리해야할 모든 일들을 내 기억력에 의존하거나 중요한 일들 중심으로 다이어리에 기록했다가 놓치는 '사소한' '많은' 일들로 야기되는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내가 해야하는 일들을 모두 뇌에서 끄집어낸 후, 그것을 '일정 내에' '끝나게 만드는' 자동처리 도구를 다이어리(플래너) 안에 담았다. GTD가 정의하는 '컨텍스트'니 '다음 실행'이니 하는 개념들은 죄다 내가 해야하는 사소한 일들을 빠뜨리지 않고 처리하도록 만드는 룰에 불과하다.


홀라크라시가 작동하는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GTD의 철학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홀라크라시 헌장은 국가의 헌법처럼 강력하게 작동한다. 자율경영이 되도록 돕는 셀조직과 가버넌스 회의, 오퍼레이션 프로세스는 하나의 기업이 결정해야할 많은 사안들에 대한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단호하고도 꼼꼼하게 정의된다. GTD가 개인이 해야할 일들을 놓치지 않고 다 처리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면 홀라크라시는 기업이 처리해야할 결정들을 몇몇 관리자의 자질이나 재량, 한계에 상관없이 처리하게 만드는 '관리 자동화 시스템'인 셈이다.

 

이쯤되면 내가 정작 하고싶은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홀라크라시는 몇몇 고과권자, CEO, 매니저가 가진 힘을 평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직장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개념이 아니다. 물론 그런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홀라크라시는 회사 안에서 누구도 잉여로운 존재가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궁극적 목표인 시스템이다. 기계의 발달은 인간이 힘들어하는 단순반복적인 작업을 대체해왔다. 초기의 컴퓨터 또한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 엑셀 프로그램이 500명에게 부여된 특정한 반복 계산을 드래그(drag)만으로 해결해줬다.

 

하지만 알파고가 인간 고수 이세돌과 커제를 단숨에 이기는 시대가 왔다. 과거에 단순 반복적인 일을 기계가 대체했다면 현대의 기계, 컴퓨터, IT기술은 반도체 조립공정 같은 고도로 정밀함을 요하는 작업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연산, 나아가 라이센스를 취득해야만 하는 회계사, 변호사의 고난도 서류작업, 소설 창작, 스포츠 중계까지도 기대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직업군에서 컴퓨터는 인간 고수를 이길 뿐만 아니라 휴먼에러로 인한 사고나 오류 등을 줄이는 효과마저 기대할 수 있다.

 

대기업에서 기대하는 고수의 자리는 어디일까. 혹은 인간의 실수나 오판단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 영역은 어디이겠는가. 당연히 관리자의 영역이다. 그래서 인재존중, 인재존중을 외쳤고 한 사람의 임원을 키우려면 10~2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한 기업 내에서조차 모든 관리자가 동일한 품질(?)을 보장하지 않는다. 관리자의 능력과 태도에 따라 한 부서의 성과가 좌우되고 그의 성향이 부서 전체의 일추진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더 나아가 관리자들 사이에서도 실적 다툼을 하며 그런 다툼이 특정 사업부에는 이익을 주지만 정작 기업 전체의 이익에는 반하는 행위가 될 때도 많다. 

관리자 없는 조직, 가능할 것인가.

 

급여도 많이 받고 영향력도 지대한 관리자, 결정권자가 없이도 자동적으로 운영, 결정되는 기업이 가능하다면. 휴먼 에러도 없고 관리의 '품질 산포'도 최소화되는 시스템이 있다면. 아마 내가 회사의 주인이라도 그런 시스템에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홀라크라시는 자동 경영시스템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만약 관리자의 역할을 보다 디테일하게 분류하고 그것을 실무자에게 위임시킨 뒤 조직 안에서 투명하고도 엄밀한 '가버넌스 룰'에 의해 운영되게 만든다면. 그 가능성의 실현이 바로 홀라크라시다. 데이빗 알렌의 관리 노하우를 접목하여 기업의 중요 결정들을 몇몇 관리자가 아닌 조직 단위의 개개인에게 위임하고 그 조직의 촘촘한 룰이 자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든 '반'자동 경영 시스템인 셈이다.

 

기업은 컨베이어(공장/공정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누구도 작업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잉여로울 수 없는 사업장을 이뤄냈다. 그후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조직 내의 개개인을 경쟁시켜 성과를 내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수동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으로는 성과를 내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보다, 경쟁사의 동일 업무를 하는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재'가 되기 위해 소위 자기계발, 일정관리의 구루들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 단순반복적인 일들은 기계가 대체하게 되었고, 우리는 부가가치가 더 높은 직업을 얻기 위한 라이센스 경쟁, 자기계발 경쟁의 레드오션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렇듯 구직자들이 알아서 경쟁우위에 서기 위해 자기의 역량을 내재화함으로써 채용할 수 있는 인력풀은 넘쳐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더 안정화시키면서도 비용을 절감시킬 영역으로 관리자, 전문경영자의 영역을 쳐다보고 있고, 내 생각으론 그 대안이자 시발점에 홀라크라시가 서 있는 듯 하다.   


아마도 홀라크라시가 기업에 정착하려면 상당한 난항이 예상된다. 회사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조직 문화 자체를 확 뜯어고쳐야 하는 고질적 문제로 인해, 선방을 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구방식으로 회귀하는 기업도 생길 것이다. 나는 뜬금없지만 홀라크라시 시스템을 보면서 문득 알파고를 떠올렸다. 홀라크라시는 오랜 기업문화를 버리고 관리 권한을 가진 개개인이 홀라크라시의 복잡하고 업격한 룰을 체득해야만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반자동 시스템'이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복잡한 거버넌스 과정을 조직의 개개인이 힘들게 체화해야 하지 않고 '알파고'에게 맡기게 된다면 어떨까.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자율경영시스템이 되지는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모든 기업이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를 고용한 것 같은 효과를 얻게되지 않을까. 그것도 그들의 천문학적 연봉을 부담하지 않고도 말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홀라크라시'를 소름돋게 읽었다.

 

201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