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특히, 말이나 글과 그 담화자의 인격과의 연관성에 대한 생각. 나이가 들면서 나는, 예전보다는 말로 사람을 평가하려는 습관을 버리려고 애쓰고 있다. 말과 말하는 사람 사이의 연관성이 그리 견고하지 않은 까닭이다.
극단적인 예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 씨는 아버지에게 유년시절부터 성폭행을 당했는데 그 아버지란 사람이 무려 교회 목사님이었다. 은수연 씨가 집에서 도망쳤다가 아버지에게 잡히면 길거리에서건 경찰서에서건 그 목사 아버지는 말로 주변 사람들을 구워삶았고, 주변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은수연 씨를 '매번'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곤 했다고 한다.
반대로 말로 자주 오해를 사고 말만 하면 그 의도나 진정성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있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은 유시민 전장관이 말 때문에 오해 혹은 피해를 입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종종 말했는데 나 또한 공감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치인과 같은 공인이나 연예인들, 작게는 직장 동료의 한 두 마디 말에 사활을 거는 듯한 극단적인 평가나 정서적 비난에, 회의적이다.
그런 단회적인 말 몇 마디로 그 사람의 인격 전체의 퍼즐을 맞추려는 시도들은 대체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했든지 그 사람을 10, 20년 주시하고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는지 어디에 시간과 돈을 쓰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그 사람이 정작 마음속에 두고 있는 바를 자연스레 알게 된다. 말은 자주 사람을 속인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한 사람을 10년 이상 지켜볼 아량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사실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내 관심 영역에 대해 그 사람들이 내 생각이나 주장, 가치관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지, 반대하는지, 혹은 말을 바꾼 적이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사실 내 기준에 부합하는 영역에서만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한 두 개의 기사나 글에서 한 인간의 속내를 찾기 위해 퍼즐 조각들을 맞추듯 애를 쓴다.
그렇다고 해서 말과 글이 그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건 반대쪽으로 너무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일관성마저 부정하고 허우적대다가 일말의 지향점마저 잃어버리는 모습이랄까. 사실 매체나 대중에게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가정하는 편이 옳다. 물론 그 가정은 항상 틀릴 확률이 존재하겠지만.
따라서 나는 말과 글을 한 인격을 단기간에 평가하는 도구나 잣대로 활용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말과 글을 통해 그 사람의 균열 지점, 숨은 속내를 훔쳐볼 수 있는 하나의 보조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적극 찬성한다. 리트머스지 같은 용도 말이다. 특히 나는 다듬어지지 않은 말과 글에 집중하는 편이다. 말과 말 사이에 끼어드는 실수들, 헛나온 말, 행간에 독립적인 어색한 문장들. 자크 라깡의 지적대로 그 말들 속에서 정작 담화자의 민낯을 추정해볼 수 있다.
멀쩡하던 유명 인사가 큰 사건에 휘말리고 나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뜬금없이 할 때,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질타에 오해라고 손사래를 칠 때. 우리는 그의 안정된 일상 속 잘 정돈된 담화에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어떤 속내를 경험하게 된다. 그 말(실수)이 말하는 사람의 전부를 규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균열지점을 통해 적어도 그 인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생긴다. 전에 했던 말과 글이 이제야 그 인격과 대면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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