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통, 세상의 고통.
이것들이 인식될 때마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들이 들 때가 있다. 예수가 구원을 이야기한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속사. 그 어딘가에 태어난 나, 우리.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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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사명, 선교명령은 새 밀레니엄이 오기 전에 땅끝, 즉 10/40창에 속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들어가야만 선교과업이 완성된다고 믿었고 그 연장선 상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이 사는 곳으로 파송되었다. 그 와중에도 선교명령에 부합하지 않는 곳에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문화 속에 제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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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already but not yet'이란 구속의 표준 교리를 알고 있었지만 '이미' 보다는 '아직'에 방점을 찍은 천국을 바라보며 지금은 충분치 못한 현실에 대한 헌신, 절제를 미덕으로 삼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르페디엠'이 우리의 신앙 모토 '지금 여기'로 둔갑했고 '이미'의 신앙이 더 중요한 미덕이라는 사실을 무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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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선교사명을 약화시킨다. 구조-방향 모델은 복음전도, 즉 선교의 당위성을 희석시킨다고 느꼈고 그것을 당대의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진영과의 논쟁, 화해 속에 양날개 이론, 그 중에 복음전도의 우월성을, 다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나아가 총체적 복음, 통전적 복음이라는 개념으로 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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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구별되지 않는다, 이른바 '전략', '운동'과 '삶'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는 통찰에 기인한 반성이자 어느 정도의 혜안이었다. 하지만 통전적 복음이 '이미'쪽으로 옮겨온 순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사명이었던 선교의 동력은 금새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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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밀레니엄을 넘긴 시점에서 사명은 늦춰졌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혹은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기술은 진보하여 오지에서조차 인터넷망과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선진국에서 파송하기 전에 선진국으로 다국적의 비기독교인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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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이 고달픈 사람들은 고달픈 대로, 나 같이 죽음 이후의 삶?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묵상,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실존적 신앙의 고민이 늘어간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떠드는 근본주의적 교회 집단 외에는 이제 천국, 하나님 나라, 내세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는 기독교 특유의 목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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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 통전적 복음이 현대적 문화 풍조와 콜라보를 이뤄 '지금 여기'의 신학으로 자리잡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연속선 상에서 악이 소멸되는 형태로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재림의 임박을 알린 정경의 메시지와 달리 왜 이천년 동안 우리는 악이 소멸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나 더 버티고 있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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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버틴다는 표현을 다수의 인간이 쓸 수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괄목할만한 진보와 기술발전, 수명의 연장, 덕질의 향연과 극단적 쾌락과 엑스터시를 즐기면서, 언젠가는 도래할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며 사는 건 아닌지. 갑자기 엄습한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내세의 희망을 손짓할 때, 그 모든 종교에 기대는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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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이천년이라는 시간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은 우리는 우리의 삶, 죽음에서 기독교 자체를 소외시킨 건 아닌지를 말이다. 말과 삶의 일치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듯 내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과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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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체험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은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지만 그 이상을 믿는 것이다. 살면서 믿음에 대해 교조적, 논리적, 확신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살면서 교리에, 세상문화에, 기독 전문가 집단에 번번이 신앙의 권위를 내어주곤 했다. 그 권위 안에서 내 신앙의 논리와 체험을 통합하고 정립시키려고 애쓰곤 했다. 물론, 그 권위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모든 게 나 자신과 일정 부분은 소외된 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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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거칠게 쓰자면, 내 생각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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