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무싸.
모자무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 일단은 대사가 너무 좋았다. 최근 몇년간 본 드라마 중에서 빨리보기를 누르지 않은 건 오랜만. 내가 최근 즐겨본 드라마 대부분은 1, 2회때 엄청난 떡밥을 던져서 흥미를 유발시키고는 그것을 풀어나가다가 5~8회 정도에는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늘리거나 주연 배우들의 화보를 찍거나 광고 장면이 많거나, 아니면 어쨌거나 시작과 엔딩 사이를 잘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아서 드라마 대부분을 빨리보기를 누르며 보곤 했는데 무자무싸는 넷플릭스가 한글 자막을 넣어주는 게 고마울 정도로 매회 대사를 음미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모자무싸가 겉으로 보이는 부분, 즉 사람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부분보다는 이야기가 더 깊다고 평하고 싶다. 전남친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변은아라는 캐릭터가 이번에는 찌질하고 별볼일 없는 황동만을 좋아하면서 또다시 그에게 재능을 낭비한다. 그녀는 스스로 독립적인 여성으로 사회에 자리매김하기 보다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기대려고 하고, 황동만의 형이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묻자 주저없이 ‘강한 엄마’가 되는 것 - 중년 ‘아저씨’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바로 그 대답 - 이라고 답한다.
반면 그녀를 버린 엄마 오정희는 그녀 자신도 부모, 특히 아버지의 학대를 받고 자랐지만 사회에서 남성 톱배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악착같이 배우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이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사회적으로는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유리천장을 깬 여성이지만 친딸인 변은아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자 상처의 근원인 존재로 그려진다. 이쯤되면 똑똑하고 능력있는 여성이 이렇게나 보고있으면 답없는 남자들의 들러리를 서거나 혹은 똑부러지게 살고있는 여성을 냉정하게 그리는 드라마가 누군가에게는 좋게 보일리 없다. 일단은 공감한다.
허나, 내가 보는 이 드라마는 좀 다르다. 일단 변은아는 자신의 결핍을 직시하고 있는 (내 기준에) 똑똑한 여자다. 그녀는 성공이나 사회에서 단독자로 멋지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주변 사람들의 무례함에 종종 찾아오는 '자폭하고 싶은 마음', 나를 최초로 거부한 친엄마에게 버려진 그 결핍을 매워줄 존재가 있다면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내편이 된다면, 나는 문제없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내편이 된다는 건, 세상의 잣대와 무관하며 오히려 세속적 성공과는 달라야만 달성이 되는 상태다. 왜냐면 내가 부르면 언제든 올 수 있어야 하고 전화하면 언제든 받을 수 있고 코피가 날 정도로 바닥인 감정상태를 쉴새없이 재미난 이야기로 마음의 시름을 잊게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내 구원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 사람들은 황동만을 찌질하고 사회성도 부족하여 주변 관계도 고려하지 않고 쓴소리를 한다지만 그녀가 볼 때 세상에 적응하고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가장 취약했던 아이시절에 그저 사회에서 인정받는 계급,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 자식을 버리기를 마다않는 별볼일 없고 위선적인 존재들일 뿐이다. 그 위선 앞에서 굽히지 않고 끊임없이 뼈때리는 말을 면전에서 해대고,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나 약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착한 이 사람, 황동만이야말로 진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기에 내가 반드시 곁에 두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그녀의 삶의 목적이 ‘엄마’라는 말에 다수는 젠더 이슈로 넘어지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이 태초에 조물주에게 창조되고는 바로 버림받은 피조물의 상처에 가깝다고 느꼈다. 변은아가 말하는 ‘강한 엄마’는 가부장제 안의 모성이라기 보다는 갓태어나 나약한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별볼일 없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성체, 이른바 ‘참된 어른’이자 '부모'의 강함을 의미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세상을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도와줄 소수의 사람이 필요한 인간과 우뚝선 자신을 바라봐줄 다수의 사람이 필요한 인간. 후자의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내가 설명하는 잣대로 보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결핍이 크지 않은 사람은 사회가 무섭지도 않고 그저 내 능력을 표현할 무대와 같다. 하지만 전자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안온하게 늙어죽을 수 있게, 자주 자폭하는 감정이 들지 않게 ‘도와줘’라고 용기내서 말하면 나만 바라보고 달려와줄 한 두명의 사람만 곁에 있다면, 그것만이 나를 구원할 것이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나는 경험적으로 부모라는 존재가 이제야 나를 옭아매는 자장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어떤 부모는 사이가 안 좋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렸거나 자식마저 구타했고, 아빠가 집을 나갔거나 반대로 엄마가 떠났거나 아니면 변은아의 부모처럼 둘 모두 자식을 떠났을 수도 있다. 뜻하지 않게 자살한 부모를 경험한 자녀도 있고, 유년시절 둘도 없는 친구가 죽거나 형제자매의 죽음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일단 결핍을 인정하고 나면 세상을 직시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잣대가 중요하지 않고 세상의 안목과 성공이 내 삶의 근본적인 목적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 결핍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면 된다.(그게 성숙의 시작이다.) 내가 더 나은 상태에 이르는 길에 집중하는 삶이다. 그게 세상 찌질한 황동만을 선택하는 일이건 내 엄마처럼 나를 버리지 않는 강한 엄마가 되고 싶은 일이건 간에 말이다. "삶의 목적이 뭐야?" 드라마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지난번 드라마에서는 ‘이제는 평안에 이르렀는지’를 물었을 때는 중년 이후가 되니 서서히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는데. ‘목적이 뭐냐’는 이번 질문 앞에서는 이것저것 병풍 같은 것들을 가져다가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 아직도 많은 것 같아 새삼 놀랐다. 그래서일까, 이 드라마가 나보다는, 내 안목보다는 훨씬 깊다고 느꼈다. (쓰다보니 길어져서 억울한 마음에 13일째도 태그도 그냥 얹었다.) 적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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