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나는 자존감이 높다는 말을 듣곤 했다. 때론 그 어느 수준을 넘어서 잘난 척한다거나 나르시시즘에 가깝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거기에 덧붙여 '까칠하다'는 말은 덤으로.-_- 물론 이젠 그런 말을 잘 듣지는 않지만, 한때 꽤나 논쟁적이고 비판적이어서 아마도 타인을 그렇게 까댈 수 있는 이면에는 높은 자존감 내지 자신감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다들 했던 것 같다.
일면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어느 시점 이후부터 액면가로 나 자신의 삶이 선물이라거나 내가 가진 것 이상의 운, 혹은 거품을 얻었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가장 큰 내 핸디캡은 건강이다. 열 살부터 나이 서른을 넘길 때까지 나는 심한 알레르기로 스테로이드를 달고 살았다.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결막염, 중이염 등 피부로 올 수 있는 질병은 모두 심하게 앓았고 염증이 심해진 부위에 따라 자주 의사들에게 청력을 잃는다거나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다. 나이 스물을 넘기고서도 대학원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두고는 알러지성 백내장 수술을 했고 그때부터 노안을 얻어 지금도 가방엔 돋보기를 들고 다닌다.
솔직히 질병이 고통인 시간도 길었지만, 고통의 기억보다는 내 부실한 '몸뚱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커졌다. 나는 불과 한 세기 전에 태어났다면 사십 대 이전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했을 거란 상상을 종종한다. 피부병으로 많은 조선 임금들이 고생을 하다가 죽어나간 역사를 보면서는 내 수준이었으면 이미 오래전에 여기저기 다 망가졌겠다 싶다.
이십 대 후반에 백내장에 걸려서 시력을 잃었는데 그때 수술로 인공수정체를 얻지 못했다면 나이 서른부터 책을 제대로 읽지도 사람을 구분하지도 못하게 되었을 거란 상상을 하면. 활자 중독인 나로서는 지금도 몸서리치게 무섭다. 그렇게 이전 세대의 중년들은 질병에 취약했고 치료에 어려움이 있었고, 대다수가 가난했고 사오십대의 나이에도 자식들에게, 혹은 자식들을 위해 '고려장'을 (당)했다.
10년 사이에 급변했던 사회와 기술의 발전은 이제 5년 내지 2,3년의 주기로 짧아지고 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때론 긴 호흡으로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를 묵상하다 보면.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지금 이 시대의 혜택에 의해, 나는 꽤 멀쩡한 존재로 대접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건강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던 나 같은 아이가 불혹의 나이에도 타인의 보호나 보살핌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자주 감사하다.
높은 자존감. 아마도 그건 자기의 액면가 현실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매 순간 한다. 생각만 하다가 오늘은 그냥 한번 끄적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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