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서 8년전 오늘 올린 글이라고 알려줬길래 읽다가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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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홍성훈 목사님 담벼락글을 읽었다. 내용인 즉슨, 홍목사님이 올린 설교문 중간에 "전설에서와 같이"라는 대목을 읽고 이후 설교문을 닫았다는 댓글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셨다는 내용. 그 댓글을 쓴 사람은 '성경은 진리이지 전설이 아니다'라는 교리를 가지고 홍목사님의 설교글을 잘라낸 셈이다. 교리에 너무도 충실한 개신교 교인들. 성경이 훼손되면 인간관계도 잘라낼 마음의 준비가 언제나 된 이들.
예수는 신자들을 빛과 소금, 빵에 들어간 이스트(누룩)에 비유하곤 했다. 소수이지만 신앙을 가졌을 때 그 공동체에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향력 아래서 결국 사람들의 공동체가 태초에 신이 만들었던 이상적인 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을 약속했다. 그것이 기독교가 신앙이라고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간이다.
문제는 이 믿는 행위 자체의 설득에 있다. '예수 믿으세요'라는 전도행위는 내러티브보다는 어떤 유목적성을 띈다. 그것은 너도 좌파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화작업에 준하기도 하고 우리 종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어떤 위협이기도 했다. 내가 속한 복음주의, 특히 개혁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교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게 만드는 것이 주요 골자로 설명되곤 한다.
또다른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한 개혁주의자들은 교리의 전달자로서, 이른바 전도의 유목적성을 이행하기 위해 세상 곳곳에 숨어들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행위 중에 세속 사람들과 너무 친해지면 '세속화'되었다고 정죄당하기도 한다. 이웃과 일상을 살아내기 보다는 급파된 특공대였고 의식화 작업이 끝나면 미련없이 그 곳을 뜰 수 있는 정예요원에 가까웠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행위 주체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무엇보다 한국 개신교의 비극은 그것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창녀를 보기에 앞서 성적 문란함을 정죄하고 동성애자를 보기에 앞서 동성애를 정죄하고 사람을 보기에 앞서 교리로 그 행위를 정죄라고자 하는 '일처리' 방식은 기독교를 더욱 정제된 종교로 만들기 보다는 사람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기독교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만든다.
최근 떠돌고 있는 신천지 동영상에 많은 개신교인들이 경악한다. 흥미로운 건 일반인들보다 개신교인들의 분노의 목소리가 높다는 사실이다. 그간 신천지는 기성 교회에 침투하여 교인들에게 그릇된 교리를 전달하고 교회를 와해시키고 무너뜨리는 첨병 역할을 해왔다. 선교단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교회 안에서 신천지는 인간 아닌 그 무엇, 어떤 유목적성을 가지고 교회 안에 침투하여 자신의 교리를 퍼뜨리고 기성 조직을 개혁(파괴)시키고자 했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신천지의 전략에서 우리는 무언가 뜨끔한 대목이 있다. 신천지는 교회 안에서 함께 일상을 살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교회에 들어와서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고 교회 안의 목사와 기타 영향력있는 존재들의 문제점을 지적해댄다. 교회 안에서 혼란이 커지고 무너질 즈음 그들은 다른 교회로 향한다. 이 전략은 '세상-교회의 전도 모델'이다. 그저 세상은 교회가 되고 교회는 다시 신천지가 되었을 뿐이다. 결국 신천지는 이른바 '교회의 누룩'이 된다.
한때 일본 제품 짝퉁을 양산하던 한국은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통해 기술력을 습득하여 세계시장에 진출했다. 요즘은 한국 제품 짝퉁을 중국이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건 리버스엔지니어링이 개발도상국가의 흔한 트렌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제품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분노는 그 도를 넘어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 짝퉁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분노가 신천지를 바라보는 개신교의 분노와 참 비슷하다고. 그것이 역기능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게 아닐까 조심스러운 진단도 해본다.
결국 내가 하고픈 말은 이런 거다. 신천지의 요즘 활동을 보며 세상을 향해 '신천지는 이단'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철저하게 우리의 방식이 그들의 방식과 닮지 않았던가를 반성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의 전도가 그들의 전도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친구를 질질 끌고서라도 교회에 가겠다던 무명 학생의 글에 전율하던 바로 그들이 아니었던가.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가서 교리를 주입하겠다던 기독교 세계관의 첨병이 아니었던가. 그 중심에 정말 예수의 심장이 있었던가. 우리의 공동체에 그들을 초대할 만큼, 우리의 삶의 방식을 자랑할 만큼, 예수가 다시 오면 이보다 몇갑절 좋은 세상을 맞는다는 그 본보기로서의 교회가 한국사회를감동시킨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여전히 문맥에 상관없이 화자의 인격에 상관없이 성경을 '전설'이라고 말하면 페친을 끊고 무례하게 댓글을 달아야 직성이 풀리는 정예요인이 아닌가. 나는 그 점이 걱정스럽다. 우리가 여전히 '괴물'인게 말이다.
201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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