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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에 관하여

(4) '인맥힙합'으로 돌아본 세대론

지혜로운 앞 세대의 판단이란 게 있다. 타이거JK는 디기리의 랩이 끝나고 차마 FAIL을 누르지 못한다. 아마도 그간 힘들게 재기(?)를 준비해온 그에 대한 배려, 연민...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나아간다면 '내가 뭐라고 디기리의 랩을 판단하고 가부를 결정하는가' 이런 생각, 1세대 프로인 그와 자신의 위치를 순간 돌아봤을 수도 있겠다. 내가 여기에 앉아 있지만 그와 나는 힙합판에서 함께 자라온 같은 뮤지션 '급'이 아닌가. 젊은 애들이야 관심도 없고 잘 모르겠지만 디기리라는 존재는 한때 허니패밀리에서 리듬의 마법사라 불리던 '프로 래퍼' 아니던가.

게다가, 오히려 이 '현자'는 영비에게 유일하게 FAIL을 줬다. 영비는 고등래퍼 우승자이지만 쇼미6에 나오면서 일진 논란에 다시금 휩싸였고 나아가 우승자의 재지원을 반기지 않는 목소리도 크다. 타이거JK는 "젊은 나이에 리듬을 잘 타고 딕션이 멋지다"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원치 않더라도 책임을 어느 정도는 지고 살아야 한다" "말이 총알보다 무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일하게 FAIL을 누른 프로듀서가 됐다.

 

이 두 판단은 논란거리가 됐다. 충분한 실력을 가진 영비는 FAIL로 평가하고, 충분한 실력을 가지지 못한 디기리는 FAIL로 평가하지 못하는 그는, 현자가 아니라 '인맥힙합'이라는 논란과 불명예를 얻었다.


나는 이 지점에 멈춰 섰다. 나를 포함한 내 선배 세대의 지혜, 판단의 근거랄까 우리가 가진 가치판단의 핵심 단어는 '히스토리',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등등으로 표현되는 통시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자는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본다. 그 토대 위에서 현재의 좌표를 점한다.

 

현자는, 젊은이들, 혹은 어리석은 부류들이 범접할 수 없는 판단-통시적 관점에서 현재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냉정한 논리나 사리사욕, 혹은 대의조차 뛰어넘는 판단을 한다. 그것도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다한다.

 

지금의 젊은 래퍼들은, 그런 점에서 타이거JK의 시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치열한 경쟁, 1세대 래퍼의 올드한 스타일, 딕션에 조소를 감추지 못한다.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잘하는 이라면 인정하겠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치 더블 케이가 여전히 박수를 받듯.

 

나와 내 선배들은 통시적 관점을 소유했다고 자부한다. 후배들이 보지 못한 시야를 확보했고, 오랜 경험으로 습득한 노하우들을 통해 그들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실 이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우리 세대들의 한계가 될 것이다. 이 모든 전제는 그동안의 오랜 역사, 내러티브, 많은 사적 스토리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판단력과 시야를 넓혀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을 때만이 유효하다. 

 

하지만 이들이 경험하는 세대는 우리가 경험한 세대와 다르다. 우리에게 유효했던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 우리가 추억했던 많은 환경들이 이들에게는 굳이 곱씹지 않아도 될 만큼 불연속적 경험으로 전락하고 있다. 주판을 튀겨야 암산을 잘했고 구구단이나 수많은 백과사전을 암기했던 인간, 혼자 골방에 앉아 신곡 하나를 창조하기 위한 창의성은, 이제는 네트워크의 바닷속, 수십만 곡의 샘플링 안에서 곡을 얻는 젊은 세대의 경험과 결코 같아질 수 없다. 

 

이른바, 더 많은 '특이점'들을 나열할 수 있겠지만 각설하고 결론만 말한다면, 1세대로 대변되는, 내 세대들은 멘토를 자처한답시고 '현자 코스프레'를 할 수 없는 날이 곧 닥칠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젊은 세대의 어리석음으로, 멀게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함으로 치부하겠지만. 곧 이 세대에 맞는 조언을 할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디기리를 리스펙 하지 않고도 더 진일보한 랩을 향유할 수 있다. 영비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1세대 래퍼들조차(혹은 많은 전세대 셀렙들조차) 변화된 매체의 성향과 대중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고와 분란, 우울증에 시달린 채 제대로 현실을 헤쳐나가지 못하고 있다. 선배 세대는 무엇을 근거로 현자임을 자처할 수 있을까. 누구는 FAIL을 주거나 안 줄 수 있는 판단의 근거를, 그 혜안의 전제를 찾을 수 있겠는가.

 

...쇼미6를 보다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