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구내식당을 갔을 때 일이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데 메뉴 중에 '사랑방정식'이라는 게 있었다. 당연히 그 메뉴는 '사랑방 정식'(식당 이름이 사랑방이었다)이었지만 나에겐 왠지 ‘사랑 방정식'으로 읽혔고 식사시간 내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폈다. 남녀 간의 사랑도 무수히 많은 변수들과 구속조건(boundary conditions)으로 정의된 방정식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방정식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그 문제를 풀어내면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해서도, 좀 더 딱 떨어지는 해답을 얻을 수 있겠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 지금부터 20년간 연구한 그 해답을 알려주겠다…라고 말하고 싶지만.(ㅠㅠ) 상상은 그때뿐, 사랑에 관한 방정식 따위는 금세 잊어버렸고 갓 스물의 나이답게 다분히 감정에 이끌리는 대로 연애를 했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을 잊고 지냈는데, 비슷한 생각을 할만한 계기가 생겼다. 최근 회사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맡게 된 것이다. 주로 부서에 배치된 신입을 대상으로하는 각 부문별 OJT 활동인데, 지루하게 업무 얘기, 회사 생활 얘기만 할 수 없어서 흥미로운 자료들을 찾던 중 Ana Swanson의 'When to stop dating and settle down, according to math(수학적으로 데이트를 멈추고 정착할 시기는?)'라는 워싱턴포스트지 기사를 발견했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기사의 핵심은, 몇 명의 데이트 상대를 거쳐서 결혼해야 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박, 수학 만세…)
일단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세상의 절반이 이성이고, 그 절반의 이성 중에 분명 나와 너무 잘 맞는 사람(결혼상대)이 어딘가에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만나려면 일단은 물리적으로 데이트를 해야 나와 잘 맞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과연 몇 명과 데이트를 해야 결혼 상대를 만날 수 있겠는가. 운이 좋다면 불과 몇 번만에 만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몇백 명과 데이트를 해도 정작 최상의 결혼상대를 못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다. 제대로 인간을 이해하려면 최소 1년은 만나야 한다고 볼 때(게다가 헤어짐의 아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10년 동안 매년 쉴 새 없이 사람을 바꿔가며 데이트를 해야 10명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평균적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결혼을 한다고 하니, 10명과 씨름하는 사이에 정작 내 결혼상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버릴 수도 있다.
결국 이 기사가 설명하는 수학적 접근이란, 이런 제한적인 데이트 현실 속에서 최상의 결혼상대를 만날 확률을 높이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우리 모두의 정신건강을 위해 복잡한 수식 설명은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하는 게 좋겠다. 일단 가정이 필요한데, 스스로가 결혼 전까지 만날 데이트 상대의 숫자를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므로 어림잡아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열아홉 살부터 데이트를 시작해서 서른다섯 살에 결혼하겠다고 가정하고, 데이트 주기는 2년이라고 가정하면 16년 동안 8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는 마지막 데이트 상대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후의 계산은 비교적 간단하다. 일단 이 8명의 잠재적 데이트 대상 중 37%에 속하는 2.96, 즉 3명과는 호불호와 상관없이 무조건 헤어진다. 그리고 그다음에 만나는 사람들 중 헤어진 3명보다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 원리를 알고 싶다면 기사를 검색해서 읽어 보거나, 한나 프라이의 TED 강연, 'The mathematics of love'을 들어보기를 권한다.)
이 법칙의 핵심은 이후의 대상과 비교할 수 있는 최소 피봇점(pivot points, 여기에서는 37%가 여기에 속한다)을 세워서 확률을 높이겠다는 취지이지만, 사실 이 방식에는 크게 두 종류의 맹점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처음 3명 중에 자신의 이상형이 속한 경우 영원히 더 나은 사람을 만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맹점은 처음 3명이 모두 이상형과는 한참 거리가 먼 최하위 부류일 경우, 4번째 만난 사람이 정작 '그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앞서 만난 3명보다 나으므로)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이런 맹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8명과 데이트를 하기도 쉽지 않으므로 수학의 힘으로 보다 안정된 배우자를 선택할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장점은 분명히 있는 셈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이 기사를 읽다가 문득 신입생 때 본 '사랑방정식' 메뉴를 떠올리며 잠시 웃었다. 그리고 신입사원 교육 때마다 이 기사 이야기를 하곤 한다.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는 많은 이들, 특히 아직 연애 경험이 없는 젊은 싱글들에게 이런 차가운 수학적 접근 자체가 불편하거나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야 결혼도 했고 이제는 이른바 ‘정상 상태(steady state)’에 돌입했으므로, 연애에 대한 판타지나 배우자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배제한 채 이런 생각을 다소 건조하면서도 유쾌하게 나열할 수 있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학 법칙은 최소한 두 가지의 배울 점이 있다.
첫째는, 배우자 선택이 생각보다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의 도움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결혼하면서 이혼을 꿈꾸거나 소망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부부들이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결혼생활이 이어질 때 이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많은 수의 부부가 이혼을 선택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혼할 계획이 없는 한 결혼이라는 프로젝트의 기간은 ‘평생’이다. 평생 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이 배우자가 적절한지 꼼꼼하게 따져보거나 배우자를 정하기 앞서 이성적으로 여러 가지 리스크를 줄이는 활동(?)들을 고려해보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둘째로, 우리는 경험과 비교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보다 정확히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물건조차 여러 가지 제품들을 사용해보고, 옷도 여러 종류와 브랜드의 옷을 입어봐야 나에게 잘 어울리면서도 내 스타일을 살릴 옷이 어떤 류인지 알게 되고, 그런 경험의 축적으로 나의 기호도 발달하게 된다. 막연히 동경하던 이성에게 ‘첫눈에 반해서’ 사귀게 되어 영원히 사랑하는 노부부가 되길 꿈꾸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나는 자주 놀라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그런 신화를 믿었고 지금도 그런 신화에 부합하는 커플들을 실제로 볼 때면 뭉클한 정서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를 제외한 우리들 대다수는 신화 속 인물로 살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수학 법칙을 굳이 마음에 새길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한두 번의 연애로 평생의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내지는 자신감을 버리고 나와 비슷한, 혹은 반대로 나와 꽤나 다른 종류의 이성에게 관심이 생길 때 상대를 알아간다는 생각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게 다양한 이성과 어느 정도 깊은 교제를 통해 내 장기 프로젝트를 검증해나가는 것이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상대를 검증해간다는 게, 이 사람이 적절한 사람인지를 매사에 세세하게 따져보고 숨기는 부분은 없는지 상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시간을 허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려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공유된 경험과 시간을 통해 정말 나와 잘 맞는지 확인해나가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면 최소한 이상적인 배우자를 선택할 확률은 높일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반쪽 진실에 가깝다. 이런 좋은 수학의 도움이 있지만 정작 우리는 사랑에 관한 정확한 방정식을 세우기 쉽지 않다. 사람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런 접근이 반쪽 진실인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상대가 고정된 존재라고 생각하고 이 모든 생각을 정리해보았는데, 웬걸 사람이 변하고 사랑도 변한다. 나도 변하고 상대도 변한다. 이상형이었던 사람이 살면서 이상형에서 멀어져 간다. 상대방이 정말 좋아했던 내 기호가 내 취향이, 성격이 변해간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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