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아내는 내 눈치를 본다. 동네에 다친 길고양이들을 병원에 데려가 치료하느라 비용도 많이 들었고 시간도 많이 쓰고 있다. 어제는 자려고 누웠는데 한마디 한다.
"미안. 내가 무슨 이효리도 아닌데..."
어젯밤에는 졸려서 흘려들었는데 아침에 출근하면서 혼자 빵 터졌다.(ㅋㅋ) 사실 지난주엔 나도 회사 일이 많았고 주말 내내 아이 챙기고 집안일을 하기가 좀 피곤했다. 아내가 길고양이들 이야기를 해도 솔직히 귀에 잘 안 들어왔다. 날은 덥기만 하고 집안일 하나 끝나면 마냥 눕고 싶고.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아내가 이효리 어쩌고 하며 사과를 하니 웃기면서도 도리어 미안한 마음, 그랬다.
최근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를 읽으면서 진보운동에 대한 새삼 복잡한 생각들이 들었다. 진보정신의 핵심은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의 당시 성폭력 사건 처리는 관련된 사람들이 그저 진보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보수집단'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자주 진보운동 내부에서조차 소수의 목소리를 도외시한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이 문제가 불거지면 극우세력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선거에 패하게 된다.' 이건 마치 좌파들이 득세하면 북한이 쳐들어온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글로벌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는 우파의 논리와 묘하게 닮았다.(사족으로, 나는 우파의 논리는 평할 마음이 별로 없다)
아내와 살면서, 아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마트에서 죽어가는 앵무새들, 길을 걷다가 발견한 다리 부러진 고양이들,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달려들어 돌보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키고 회복되면 입양시키려는 노력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상의 많은 또 다른 길고양이들은 여전히 다리를 절고 돌아다니고 로드킬을 당하며 추위에 떨거나 굶어 죽기도 한다. 마트에서 파는 앵무새들과 그 밖의 다른 애완동물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건강을 잃으면) 한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박스 속 한 귀퉁이에서 숨을 거둔다.
사실 이 미물들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 나라, 혹은 제3세계의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 미혼모를 돌보는 홀트나 기타 여러 NGO 활동들, 뉴스타파 같은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는 매체의 운동들에 물질과 시간을 들여 참여하는 일들, 앵무새나 길고양이를 돌보고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말하라면 아마 하루 종일 읊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자기계발서를 읽다 보면, 시간 사용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덜 중요한 일들은 미룬다. 더 큰 일을 위해 사소한 일들은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정서가 일상적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안에서조차 자주 발견된다. 어느 순간 잃어버린 진보 패거리 속의 '진보 정신'이랄까. 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략으로서의 이율배반, 적과 싸우기 위해 적의 전략에 동화되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조금만 참으면 이루어진다고 속삭이는 '장밋빛 미래'의 약속.
동물들을 돌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전혀 즐겁지 않은 아내. 게다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자주 나에게 미안해하는 아내를 보며, 우울하지만 버티며 살아가는 진보 정신의 소박한 '현현'을 본다. 더 큰 것을 위해 미물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는 그 마음을 나는 지지한다. 아내의 모든 몸짓에 매 순간 공감을 표할 정도로 나는 섬세한 성품이 아니다. 하지만 아내가 열심히 그 일을 할 수 있게 돕는 것. 때론 가정에서 동물 때문에 소진된 아내의 부재를 느끼지 않도록 돕는 것, 아내가 미안함 없이 작은 생명들을 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 현재로선, 그게 내가 '레알' 진보적인 삶을 사는 아내를 지지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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