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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에 관하여

(1) 들어가는 글

공익근무를 하던 때의 일이다. 나는 관공서에 배치되어 행정 보조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보조라는 게 공무 보조라기보다는 공무'원' 보조인 경우가 잦았다. 공무원 아저씨들은 우리가 현역으로 전방에 가서 고생 안 하고 편하게 군 복무를 한다며 온갖 잡일을 다 시키곤 했다. 아침저녁 사무실과 회의실 청소와 쓰레기 수거부터 시작해서 건물 수리에도 동원되는가 하면, 담당 공무원 은행 심부름, 집에 두고 온 소지품 가져다주기 등등, 출근을 하고 나면 여러 잡일들을 해야 했기에 정작 행정업무는 본업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어느 조직이나 ‘또라이’가 있게 마련인데 내가 근무하던 총무과에 정년을 앞둔 공무원이 그런 부류에 속했다. 한참 민원업무를 보거나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 때면 독특한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지하철로 서너 정거장을 가면 있는 그 구멍가게(슈퍼)에서만 파는 특정 브랜드 껌을 사 오라는가 하면, 자기 차를 닦을 ‘융보루’를 세차장에서 공짜로 구해오라는 류의 일들이었다. 좋게 생각해보면 전방에서 내 대학 동기들은 한파에 훈련을 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뉴스에서도 군대 관련 안 좋은 소식들을 자주 듣던 터라, ‘가오’는 안 살지만 딱히 못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참고 지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하루는, 정말 덥고 유난히 정신없이 바쁘던 차에 그 ‘또라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공익’ 

하대하는 말투와 눈빛이 역력했다. 참자. 

 

‘가서, 내가 좋아하는 껌 알지? 그것 좀 하나 사와’ 

날도 날이었지만 나도 이제 더 이상 신참이 아니었기에 이런 일은 좀 알아서 밑의 후배들을 시키면 안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당연히 표정에 내 생각이 내비쳤다. 

 

“죄송한데 지금 바빠서 이 일만 마치고 다녀오겠습니다” 

나름 정제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또라이는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지시를 ‘유보’하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니, 빡친 것이었다. 이윽고 고래고래 사무실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공익 주제에 니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래? 니가 뭔데? 씨발 하지 마! 하지 마!” 

삿대질을 하던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발길질 시늉을 하다가 급기야 벗겨진 신발을 들고는 나를 향해 던졌다. 날아온 신발은 퍽 소리와 함께 내 가슴 언저리에 맞았고 사무실에 있던 공무원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나를 쳐다봤다. 

 

모멸감, 창피함, 분노와 당혹스러움. 이 모든 게 몇 분, 아니 몇십 초만에 일어난 일이라 이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리와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순간적으로 욕을 하고 싶었고, 나도 이런 공격을 받으면 가만있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생각했다. 그 ‘또라이’는 이성을 잃고 쉴 새 없이 욕설을 하며 신발을 던졌는데 내가 똑같이 반응하면 안 될 것 같았다. 1~2초 정도 지났을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신발을 들고 그 ‘또라이’ 얼굴 앞까지 걸어갔다. 말없이 걸어오자 그는 피하려는 듯 몸을 뒤로 젖혔다. 나는 천천히 신발을 그의 발 앞에 내려놨고, 별 다른 행동 없이 천천히 돌아서서 유유히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흥미로웠던 건, 그날 이후로 다수의 공무원들이 나에게 잔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때때로 어떤 이는 갑자기 나에게 존댓말을 쓰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또라이’를 피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그는 나를 피하는 듯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 기억은 내게 상당히 독특한 것이어서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누군가가 ‘정치적이다’ 라거나 ‘처세를 잘한다’고 말하면 그건 대체로 부정적인 표현일 확률이 높다. 물론 어느 정도의 처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출판 시장의 파이를 상당히 차지하고 있지만, 막장 드라마처럼 욕하면서 소비하는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처세가 아닐까 싶다. 나는 처세라는 말을 들으면 공익근무 시절의 ‘또라이 사건’이 떠오르곤 한다. 갑자기 날아온 분노의 신발을 맞은 돌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적절했을까. 

 

나는 종종 여러 돌발 상황을 복기하듯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습관이 있다. 그 날 상황도 여러 번 되돌려보았지만 내가 했던 대처 방법이 나름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욕을 하거나 대들거나, 반대로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없이 시키는 일을 바로 할 수도 있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 다음 행동에 대해 생각했던 게 나를 감정에 치우치지 않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을 대하는 행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더 효율적이고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정치’이고 사람들과 사귀고 살아가는 일이 ‘처세’라면 그것은 학문이나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며 제대로 배우고 고민해야 할 영역이라는 생각은 2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한편으로는 대중이 TED 영상에 열광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계발서를 쓰는 이들을 ‘꼰대’로 보는 양극화된 시선이 최근 들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백면서생보다는 경험과 숙달된 능력을 높게 치면서도 젊은 이들에게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금기 발언이 되었다. 처세에 대한 글을 쓰려는 내 입장에서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그건 일말 타당한 면이 있다. 변화가 빠르다 보니 ‘내가 해봐서 아는’ 경험과 지금 세대가 ‘하게 될’ 경험 사이에 연속성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해봐서 아는 게 오히려 혁신에 장애가 되고 구태의연한 무엇으로 전락한다. 심리학의 발달로 개인 성격, 기질, 타고난 성향에 따라 어떤 처세는 도리어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지침이 되는 일도 잦다. 예전에는 일목요연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거대담론의 사회가, 이제는 다양하고 다층적인 여러 미시 담론과 그 개성들을 받아들이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고로, 이제 처세는 더 이상 어떤 교과서적인 지침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변하는 것에 유연한 생각을 돕는 다양하고 적시, 적절한 내러티브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러티브로서의 처세관은, 사적이고도 작은 경험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경험들로부터 얻어진 혜안과 해결책들은 보다 일반적인 적용이 가능할 것 같다. 서로 다른 내러티브를 갖더라도 살짝만 ‘조옮김’을 하면 다른 노래에도 써먹을 수 있는 무엇이 될 수도 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그런 처세관을 어떤 지침으로 여기고 마음에 새기고, 매 순간 훈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1~2초 정도, 판단을 유보하는 시간 동안 적절하게 적용해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길 바랄 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