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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에 관하여

(3) '사람은 믿을만한가'에 관한

'사람은 믿을만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체적인 정서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언행불일치, '알고 보니 나쁜 놈이었더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식의 절망감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종교심에 기대어 그저 사람을 신뢰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른바 일방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궁극적 사랑의 태도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누군가에게 실망감이나 배신할 것 같은 불안감을 품고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원론적으로는 옳다고 믿고 싶은 이 '입장'도, 나는 현실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대한 환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계속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자학적인 행위다.

 

사물의 '선악 미추'의 잣대가 극명하면 입장 정리가 쉽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좋아'라고 말하는 평가에는 다양한 함의가 숨어 있고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전 인격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시간 궤적의 판단에서도 그렇다. '저 사람 쓰레기야'라고 말할 때는 어떤 시점의 어떤 행위에 의해 판단된 단일 행위, 혹은 특정 상황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갖게 된 평가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한번 잘못한 사람, 혹은 여러 번이라도 특정한 영역에서 잘못된 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해 신뢰/ 불신뢰를 '모 아니면 도'로 그 사람을 바라보려는 잣대에 반대한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 섬세한 존재라서, 어떤 명확한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도 절망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주변의 신뢰를 저버리거나 악행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행한 고약한 잘못들을 열거한다면, 혹은 내가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더 많은 권력과 힘이 있었다면 '할 수도 있었을' 악행을 상상한다면. 추측하건대 나는 누군가에겐 흔적도 없이 제거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나 또한 몇몇 사람들이 내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기도했던 적도 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과 훈련에 의해 신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물처럼 주어지는 신과의 사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이 성취가 아닌 '구원'이고 '은혜'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기독교인들조차 어떤 악인에 대해 악행을 넘어 그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지구 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느낄 정도로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을 목격한다.

'사람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 느낌이 덧입혀져 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매사를 '인지'하며 살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은근히 누군가가 날 이해해주고 기대하지 않게 날 배려해주고 도와주고 지지해주길 기대한다. 때로 드물게 그런 경험을 하면 배신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기억들이 눈 녹듯 상쇄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에 대한 절망감으로 가득 찬 삶을 산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혹은 진정한 반성, 후회나 '개과천선'의 변화도 사라질지 모른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소설 '레 미제라블'의 감동 지점은 바로 '용서'의 힘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그 사람을 한번 더 '신뢰'하기로 결정해주는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험이다. 

 

'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야'

 

모든 악행에는 이유가 있고 악인은 그 악행이 습관으로, 나아가 전 인격으로 바뀐 개인사가 있다.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개별 인간들은 타인을 신뢰/불신의 평면적 평가 대상으로 치환한다. 타자를 자신과 연결된 사회적 인격체로 생각하기보다는 방어적으로, 이를테면 내 마음이 상하거나 괴롭지 않을 수준으로 관계를 맺는 자기계발서의 팁들을 찾는다. '언젠가 너도 날 배신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관계는, 그가 누구든 그 관계의 대상은 '너와 나'가 아닌 '오직 나'에 국한되기 마련이다.

 

외롭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옆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적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한시적인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기꺼이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