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 올라온 이 글을 읽고 처음엔 좀 당황했다. 양혜원님은 지금은 페북을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꽤나 친한 페친이었고 지금도 애정하는 번역가이고 또 저자다. 물론 최근 몇 년간 멀리서 지켜본 바로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였지만 대다수의 페미니스트에겐 비판과 비난을 받는 스탠스의 글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이 글이 도대체 무슨 글이냐, 누구를 위한 글이냐 하는 댓글을 보았고, 나도 그 독해에 일정 부분은 공감했다. 글의 시작에 키우던 개가 허망하게 죽은 이야기와 둘째 아이의 유산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곤 자신의 글의 무게를 생각해서인지 글의 시작과 말미는 조금 가벼운 투의 문체가 들어가 있어서 독자로서 중간에 있는 이 상실의 무게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나는 개인의 경험 글을 타인이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엔 진심을 담아 글을 쓰려고 한다.
내가 이해한 이 글의 논지는 그렇다. 요즘 반려동물을 애지중지 하는 것을 보는데 그(녀)도 둘째아이를 유산하고 개를 키웠고 사고로 개를 잃었을 때 너무 슬펐다. 하지만 그는 개를 잃은 슬픔이 크기는 했지만 아이를 잃은 슬픔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고 느꼈다. 아이의 생사는, 즉 임신은 쉽게 얻기도 하지만 절실해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영역이고, 이런 생명의 신비 내지는 초월성을, 임신중지(낙태)라는 말로 너무 단순하게 선언하고 실행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논지는 낙태를 선택한 여성, 임신중지 선언을 지지하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반려동물을 '내 새끼'처럼 여기며 자녀의 반열에 올려놓은 많은 일반 애견, 애묘인 등등을 단숨에 무엇보다 우선한 아이의 가치를 쉽게 폄하하는 부류로 '구획지었다'. 나는 설령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이렇게 글을 배치할 용기는 없었을텐데, 그간의 설득작업이 유효하지 않고 오히려 안티만 만들었다는 회의감이 있어서였는지, 이제는 정면돌파를 넘어서 약간 '서양식 냉소'의 어투마저도 느껴졌다.
페친 시절에도 애정했고 지금도 그 마음에는 크게 바뀜이 없는 입장에서, 전심으로 이 글에 대한 내 생각을 자세히 풀어낸다면 이렇다. 아내와 나는 모란앵무와 고양이, 그리고 강아지를 키웠다. 하지만 죽음(처리)은 자주 내 몫이 되었고 나는 반려동물의 죽음 가까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들이 때론 감정적으로 때론 이성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혜원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은 개의 죽음과 자녀의 죽음의 무게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가져온 금붕어가 죽었을 때보다 모란앵무가 죽었을 때 더 슬펐고, 모란앵무가 죽었을 때보다 우리집 강아지 바바가 죽었을 때 더 슬펐다. 아마 성하가 죽는다면 상상조차 못하겠는 내 마음을 보면 아마 바바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슬픔은 생명과 교감의 차원에 비례하는 것 같고, 지인의 상실이 그 무엇보다 슬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고통의 저울질'이 불편하다. 누가 더 불쌍한가, 누가 죽으면 더 고통을 느끼는가. 모든 생명을 향한 경중의 저울질은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이끌지 못한리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생명중지를 생각한다. 반려동물의 안락사부터 의식없는 중환자들의 생명권, 그리고 낙태가 그러하다.
우리집 바바가 처음 발병해서 치료를 시작했을 때, 처음 진료비가 300만원이 들었다. 여러 검사들과 시술, 약처방이 있었고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였다. 이후로도 병원에 갈 때마다 50~200만원의 비용이 청구되었고 아내와 나는 바바를 아꼈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엔 안락사를 생각했다. 그 결정을 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 연명치료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바바가 일찍 죽었고 나는 돈과 죽음 사이를 저울질할 필요가 없게 됐다. 너무 다행이라 지금도 바바에게 고마운 마음일까.. 굳이 표현한다면 여전히 죄인된 마음, 다시 만나면 속죄받고 싶을 만큼 미안한 마음이 각인되어있다. 사견이긴 하지만 나는 늙으면 자발적 생명중지, 즉 '자살'을 생각한다. 내가 구차해지고 세상과 주변에 짐이 되거나 중병에 걸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내 존엄성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 요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것 같다.
태아의 생명중지, 즉 낙태에 대해서도 동일한 생각이다. 내가 재벌이었다면 바바의 병원비와 안락사 사이에서 죄책감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백살의 노인이어도 사회, 물리적으로 취약하지 않다면 존엄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낙태는 반려동물과 아이 사이에 누가 더 가치있냐, 혹은 태아의 생명이 중요하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논리가 아니라 태아를 품게된 여성이 중지를 하게 만드는 취약조건이 무엇이냐를 규명하는 방향이어야 하고 실제로 페미니즘은 이제까지 그렇게 발전해왔다.
혜원님 칼럼의 부제는 '세상의 길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부제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기독교윤리가 사회윤리와 충돌할 때, 기독인은 전자의 신념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최근 가톨릭 행보도 그렇고 기독교도 은근슬쩍 기독교 아닌 스탠스에 기독교인들이 발을 걸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이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그래서 기독교란 과연 무엇인가 근본적인 고민이 깊다. 일례로 종종 최근 전쟁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지는 진심으로 모르겠다. 많은 현대적 각론에서 기독교를 우일신시키려는 시도들을 볼 때마다, 내러티브에서 문화 요소를 걷어낸다는 현대적 신학 해석이 기독교인지 아닌지도 모를 종교에다 자기의 '희망 교리'로 채색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기독교는 파면 팔수록 기괴하고, 그것에 기댄 성도들은 모두 양과 같이 흩어지고 있다.
*사람은 키우지 않습니다(양혜원)/ 2022년 4월 4일
https://cemk.org/25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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