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에 대한 깨달음 중 하나.
청년 혹은 결혼 초부터 사서 입던 옷들을 언젠가는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꽤나 비싸게 주고 산 옷들을 잘 보관했다. 그리고는 그 옷들에 어울리는 다른 옷들을 사게 되는데, 정작 집에 와서 매칭시켜보면 그닥 잘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고, 다시 구입한 옷에 맞는 옷을 더 고르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패션에 관심이 없는데 어설프게 대충 어울리는 옷을 소유하려는 비전문적인 나쁜 습관이 옷장 상태를 악화시켰고, 또 남자니까 혹은 나는 옷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그 악화를 고착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스티브 잡스가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고 나왔고,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게 됐다. 이후로 페이스북을 들고온 저커버그는 자신이 옷을 매칭시켜 입는데 시간도 많이 들고, 은근히 매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한벌의 옷을 정하고 그 옷을 여러 벌 사서 계속 그 옷을 반복적으로 갈아입었더니 좋았더라는 류의 기사를 읽었다. 정말 당시 저커버그는 단벌의 옷을 입고 매체에 등장하는 것 같았고, 이 두 사람의 선택이 꽤나 좋아 보였다.
종종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호나 생활습관은, 누군가가 하는 방법이 괜찮아보이면 그냥 따라하고 싶을 때가 많았기에, 그날부터 나는 옷입는 습관을 바꾸었다. 기존에 모아두었던 옷들 거의 대부분을 처분했고, 단벌까지는 아니라도 상의와 하의가 매칭되는 몇 벌의 옷을 정하고는 그 옷을 두 세 벌씩 사서 계속 입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꽤나 오래 전 이야기이고,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옷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매일 반복적으로 같은 옷을 입는 효율적인 인간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옷이나 패션에 관심은 적지만 매일 같은 옷을 입는 무료함은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전자기기도 매번 바꾸고 싶어하는데 매일 걸치고 있는 옷을 유니폼처럼 입으려고 생각했다니. 나 스스로가 정작 나에 대한 이해없이 옷입는 방식을 무분별하게 바꾼 셈이었다.
어이없긴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정작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랜 시간을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 자신이라고 믿어왔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자주 돈을 지불하고 소비하는 것, 살고 싶은 곳, 이른바 무의식 중에 하는 모든 일상적인 선택들이 정작 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더 절절하게 느낀다. 이제는 안다. 나는 단벌이 지겹다.
Short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