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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Notes

총무과장

요즘 블로그 챌린지를 하면서 예전에 썼던 글을 다듬어서 올리다보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막 떠오를 때가 있다. 특히 군복무를 위해 휴학을 하고 부산에 내려가서 병역특례 회사를 다니다가 마찰이 생겨서 그만두고, 다시 병무청에서 공익근무를 했는데 유독 그때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 하나. 당시에 나는 엄청난 양의 책을 읽던 시기였는데 내 기억으로 빠르게는 하루이틀에 한권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나의 이런 광적인 독서편력이 청내에도 퍼지면서 청장님이 나를 좋게 보셨는지 청장실로 부르셨고, 공익근무요원들과 함께 독서나눔회 같은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당시에 나는 총무과 소속이었는데, 총무과장님이 동행했고(청장이 주관하는 모임이니 과장이 직접 따라다닌 거 같다. 참고로 총무'과장'은 4~5급 공무원이다) 그런 이벤트를 대응했다. 총무과장은 친절하게도 모임 준비를 위해 당일 조퇴도 시켜줬고, 나도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준비를 해서 출근했다.

 

독서나눔회? 정확히 이름은 기억나질 않는다. 청장 회의실에 공익근무요원 15명과 청장, 그리고 총무과장이 동석한 모임에서 나는 아무 고민없이 보수언론 비판을 주제로 발제문을 나누었다. 거기에서 군문제를 다룬 보수언론, 즉 '조중동'의 패악 이야기도 꽤 주절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해맑게 빨갱이였던 나는 정말 흥미롭게 발제 내용을 듣던 너다섯명의 공익 동료와, 꾸벅꾸벅 졸던 십여명의 나머지 동료들, 그리고 얼굴이 하얗게 변한 총무과장, 마지막으로 방금전까지 할아버지의 미소를 보이던 청장님의 입고리가 땅바닥으로 내려앉은 기이한 풍경을 지켜봤다. 계절은 여름이라 창밖은 화창하게 매미가 울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독서나눔회 두번째 모임은 없었다. 첫모임이 끝나고 총무과장은 나를 따로 불러서 건물 뒷쪽 흡연 공간으로 데리고 갔고, 얼굴에 흥건한 땀을 닦더니 담배를 피웠다. 몇 모금을 빨고 나서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이도 있고, 내 세대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내 기억으로는 그 자리에 꽤 오래 서 있었지만, 그는 그 말 외에는 더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후로도 그는 종종 나를 불러놓고 "너처럼 머리가 쌩쌩할 땐 두꺼운 책을 읽어라" 같은 한두 마디 정도의 권유형의 말을 하곤 했다. 한창때라 무슨 말을 걸든 애어른 가리지 않고 논쟁처럼 받아치던 그 시절의 나는 "짧은 책도 깊이가 있습니다"라고 굳이 말대답을 했고, 그는 피식 웃고는 다시 자기 할 일을 했다.

 

생각해보니 지금 내 나이가 그의 나이정도 되는 거 같다. 내 나이에 22살의 공익근무요원을 만나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 22살은 아니지만 이르다면 20대 중반의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아마, 나였다면 독서나눔회 계획이 세워지자마자 공익근무요원의 발제문을 먼저 보여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가 빨갱이임을 미리 알아채고, 적절한 분위기의 범퍼를 세웠을 것이다. 청장도 받아들이고 새파란 공익도 울그락푸르락하지 않을 편집본을 준비시켜서 부드럽게, 강요 아닌 강요를 했겠지.

 

총무과장님이 지금 뭐하고 계시려나.. 청장이라도 달고 내려오셨으려나.. 갑자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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