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분담에 대한 아내와의 '협정'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때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나는 실질적인 여성의 심적, 물적 어려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는데 결혼을 하고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그 경험을 실감했다.
경력단절부터 시작해서 돕는 것이 아닌 분담이라는 화두를 이해한 후, 그리고 이(육아) 프로젝트는 내 스타일대로가 아닌 아내가 PM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아내의 방향과 방식을 따르되 아내가 육아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99% 수준으로 아내'처럼' 아이를 다루는 방식을 배우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자연스럽게 가사노동도 분담하게 되었는데, 내가 회사를 나가기는 하지만 이또한 아내가 PM이라는 가정으로 아내의 방식대로 가사노동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도록 집안일을 익혔다. 그게 1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는 항상 시키는 일에 안주하지 않는 능동적이면서 뼈속까지 자기계발적인 인간이 아니던가.
집안일이라고 통칭하는 허드렛일들은 특징이 있다. 누군가는 해야하지만, 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으나 안 하면 크게 티가 난다. 한두번은 큰맘 먹고 '대청소'나 오늘은 인심쓰듯 배우자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모든 루틴이 그렇듯 지루하고 지치면서도 귀찮으면서도 시간을 쓰는 일들이다. 게다가 이런 일에 매몰되면 자존감도 낮아지면서 지속되면 우울감마저 들기도 한다.
처음엔 SNS를 적극 활용했다. 공개적으로 자화자찬하기, 셀프쓰담쓰담 기법을 활용하거나, (돈처발라) 장비빨을 세우거나, 그 두가지를 섞어서 사진을 찍어서 포스팅했다. 이런 포스팅에 맘착한 사이버지인들은 '좋아요'로 화답하거나 격려어린 '우쭈쭈'를 보내줬고, 그런 것들이 몇 년간의 허드렛 일을 유지시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우쭈쭈를 즐기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효율성이 담보되지 않는 일들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개선하는 공돌이가 아니던가.
결국, 가사노동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들과 가장 하기 꺼려지는 일들을 꼽아보았다. 각자 호불호의 일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같은 비위가 상하는 일들보다는 열일하고 돌아서면 다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무의미한 일더미들이 더 나를 지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쉽게 예를 들면, 밥을 먹기 위해 그릇 정리를 하고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찬을 차리고 나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서도 다시 그것을 치우는 일에 에너지를 써야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아내와 역할 분담을 했지만, 그것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휴먼리소스는 감정이 담겨있고 매번 같은 역량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부부싸움이나 감기 몸살 등의 이유로도 분담하기로 한 역할은 바뀌기 마련이다.(역시 호모사피엔스는 나약하고 미덥지 않고 결정적인 때에 쓸모가 없다) 그래서 결국 가성비가 높은 조수들을 고용했다. 흔히 3종 세트로 불리는 빨래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가 그것이다. 물론 이 모든 조수들이 내 맘 같이 일하진 않지만, 약간의 constraint만 잘 고려하면 순서상 지체되는 일이나(빨래 말린 후 개기), 시간을 꽤 잡아먹는 일(설거지) 등을 내가 다른 곳에 집중하는 동안 말끔이 처리해주었다.
이렇게 도구빨을 세우면서 조수 3명이 충원되고 나면 허드렛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쉽게 정리되진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하고 복잡하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여지도 생기고 애궂게 기기들을 때리며 화풀이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 모든 게 허드렛일을 '정규업무'나 '찐일'로 생각하지 않고 폄하해대면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공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몇 가지의 기술이 필요하다. 다들 회사 업무를 할 때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짠밥이 차면 잘도 하면서 허드렛일할 때는 그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 같다. 기본 기술은 'Divide and Conquer' 기법이다. 포드 시스템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개념일텐데 복잡한 차를 만드는 프로세스를 잘게 쪼개고 그것에 병립가능한 노동력을 컨베이어 위에 투입하는 것이다. 혼자 차 한대 만들려면 그 사람이 알아야 할 전문지식과 기술도 무시못할 일이지만 차 한대를 만드는 일을 마치기까지 진빠지게 일을 해야한다. 진이 빠지지 않으려면 적절히 나누고 분할하여 컨디션이 나빠지지 않도록 짧게, 그러나 연속성있게 일을 해야 한다.
conquer는 결국은 merge 기법이 될텐데, 결국 일의 마무리가 되는 시점이나 일을 하는 동선, 시간 등을 고려하여 잘 나누고 다시 잘 병합해야 한다. 즉, 계획성있게 일을 해야 한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려놓고 음식준비를 시작하면 식사를 하고 나서, 빨래는 끝나있고 자연스레 건조기에 넣고 버튼을 누르고 오수를 즐기면 깰 때 즈음엔 빨래가 말라있다. 퇴근 시점에 장보기 리스트를 정리하면 오는 길에 불필요한 소비 없이 동네 수퍼에서도 필요한 생필품만 구입해서 들어올 수 있다. 음식을 하면서 불에 익는 시간, 오븐에 굽혀지는 시간에 세척기 그릇을 정리하고나면 식사 후에는 충분히 쉬고 자기 직전에 세척기에 그릇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아침에 건조된 식기와 만날 수 있다.
살면서 소소한 일에도 문제를 지적하거나 하소연을 할 때가 많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기만 하고 변하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말할 시간에 생각을 충분히 하고 우주의 체계를 세우듯 허드렛일을 계획하면 이걸 누가하냐 누가 더 희생하냐의 논쟁이 무의미할 정도로 여유로운 루틴이 만들어진다. 그걸 소유한 자는, 그저 적절한 때에 타노스가 핑거스냅 날리듯 손발 조금 굴리고 버튼 몇 개 누르면 된다. 오늘도 저녁식사는 내가 준비하는데 아직까지 이런 글이나 쓰면서 시간을 낭비해도 제때에 밥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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