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기, 이른바 '좌파이론 독서기'
그러나 휴학 후 나는 영어 침체기에 빠졌다. 군복무를 위해 휴학을 했지만, 현역이 아니었던 관계로 근무시간이나 출퇴근 복무 이후에 책을 읽을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고로, 내게 있어 휴학기는 내 인생 최고의 폭풍 독서 시기로 정의되는데 그 때 여러가지 종류의 책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불온 서적들을(당시엔 그렇게 불렀다) 참 많이 읽었다. 뼈속까지 친미가 되어가던 내가, 정 반대로 빨갛게 물드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폭풍독서기에 섭렵한 책들은 노암 촘스키(노안 아님), 하워드 진과 같은 진보 지식인의 책들과 국내에 열풍이 분 안티조선 운동의 멤버들, 이를테면 강준만, 진중권, 고종석, 김규항, 박노자 등의 책들이 이에 속했고, 오리엔탈리즘, 신자유주의, 아메리칸 원주민 학살 등등 비어있던 머리에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좌파적 논리를 채워갈수록 우리 미쿡 친구들이 마구마구 싫어지던 시기...가 그 시절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보다 그 후유증은 컸다. 복학 후에도 좌파적 생각은 지속되어 유학 준비 때문에 처음으로 밟게 된 미쿡땅도 그리 달갑지도 않았다. 거기서 대학들도 방문해서 입학사정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미국에 사시는 이모가 촌놈 미국왔다고 휴가내서 현지 가이드를 해주셨는데 나를 데리고 갔던 디즈니랜드, 유니버셜 스튜디오, 라스베가스 등등도 다 시큰둥해 했고, 미국의 모든 문화가 나쁘게만 보였다. 뼈속까지 미국을 좋아하던 내가 불과 2-3년만에 정반대의 인간이 된 것이다. (당시에 이모님에게 결례를 많이 했다. 물론, 그 이후로 이모에게는 최선을 다하게 된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자연스레 미쿡에 대한 반감이 내 영어 사랑에도 제동을 걸었고, 점점 영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줄어들었다. (사실, 그런 맘도 있었다. 영어공부 할만큼 했다는 생각, 나... 이정도면 됐지 않나. 영어회화만 몇 년을 했는데 뭘 더 바래? 뭐, 이런 생각.) 유학에 대한 기대치도 비슷하게 줄어들어 결국 대학원 과정을 미국에서 하려던 마음도 접게 된다.
인간관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미쿡사람만 보면 반가워서 겁나 말걸고 싶고, 내 영어가 잘 먹히나 확인도 받고 싶은 충동이 있었는데(아... 지금 생각해도 이건 이불킥.. 창피하다) 그 시기에는 미쿡사람만 보면 왠지 내가 아는 지식을 다 동원해서 한국 땅을 밟은 모든 양키들을 까대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간혹 외국인들이 길을 물어보면 가르쳐주고 나서 "여기는 한국이니 니가 한국말을 배워서 물어봐야한다"라고 훈계조로 말하기도 했다. (혹여 문법에 안맞는 문장으로 가오 깎이지 않기 위해 정확히 작문을 해서 미리 외워두는 치밀함도 보였다.ㅋㅋ)
'토익시험 쪽집게' 김대균 추종기
그러나(다시 다크포스...예감) '세상은 나에게 영어를 하라 하네'의 시기가 돌아 온다. 석사 2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다보니 영어 점수가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고(그땐 참 순수 멍청했던 거 같다) 나는 머리털나고 첨으로 토익 시험을 보게 된다. 처음 보는 시험임에도 나는 속으로 자신감에 넘쳤는데, 잠시 빨갱이의 삶을 살긴 했지만 그간 오랜 시간 영어공부를 했으니, 가볍게 영어신동의 기량을 보여줄 거라 여겼다. 가볍지만 속으로는 '건곤일척'의 마음으로 집중해서 시험을 봤고 정말 전력을 다해 2시간을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달뒤 나온 점수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695점...
복기하자면 토익 시험을 본 첫 인상은 그러했다. 일단 2시간을 짬없이 내도록 풀어야만 간신히 시간을 맞출만큼 타이트하게 문제가 많았다. 그 와중에 화장실도 못간다는 규정? 지침?도 이상했는데, 뭔가 시험시간에 화장실을 못 가게 하니까 왠지 더 오줌보가 자극을 받는 느낌도 있었다. 리딩 파트는 인간적으로 너무 문제가 많아보였다. 눈알을 이경규처럼 굴려야만 시간내에 다 풀수 있을 것 같았다. 더 황당했던 건, 나는 시험에서 너무 당황했고 결국 마감 시간이 다 돼서도 못 푼 문제가 꽤 됐는데, 내 주변을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다 풀고 나가는 것이었다! 뭐야 너도 영어신동이야?
그런데 말입니다..
서로 아는 이들같아 보이는 그들은 일어나면서 지들끼리 속닥거리며 나가는데.. 확, 꽂힌 말이 있었다.
"야... 진짜 다 나오지 않았냐? 나 반은 그냥 다 맞췄어."
허걱. 뭔소리야... 씨바, 지금 문제 사전 유출이라도 했다는거야. 나는 커진 눈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싸는 척하며 내 온 신경을 모아 그들의 대화를 주워 들었다. 그런데 희미하게 들린 사람의 이름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김.대.균.
당시 유사 인터넷 검색사의 실력을 가진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구글, FTP 사이트, 웹하드, 대학원 연구실 네트워크 등 온갖 경로로 정보를 뒤졌다. 유.레.카.
정리하자면 이렇다. 한때 김대균이 영어학원가에서 토익을 평정하던 시기가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김대균이 유명해진 데에는 영어공부에 대한 그의 정공법과 더불어 '꼼수'도 기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김대균은 영어강사가 된 후에도 본인이 직접 매달 토익시험을 봤는데, 그는 시험의 패턴을 알아채게 되었고 반복적으로 시험을 보면서 문제를 외워서 나오기를 거듭한다.
그가 깨우친 토익시험의 패턴 맹점은 이러했는데, 2달에 한번은 전세계적으로 치는 시험이지만 격달로 치는 시험은 각 나라별로 자체적으로 실시하기 때문에 문제 은행에서 뽑은 문제를 일부 출제했고 우리나라의 경우 꽤 많은 문제들이 그 전년도의 같은 달 에 나온 문제와 같았고 몇년을 반복적으로 시험을 친 후 김대균은 그 패턴을 알아챘던 거다. 물론 그는 정공법적인 토익 공부법도 강의했겠지만 학원에 오는 이들에게 짝수달에 시험을 권하고 각 달의 전년도에 출제된 문제들을 상당수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족보'는 2시간동안 단내나게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일반 수험생과 달리 20~30%는 답 문항만 봐도 정답이 보이는 문제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배분으로 시험을 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김대균은 토익시험에서 선호하는 답들을 DB화 해서 그 패턴을 알려줬다. 이를테면 "답 문항 중에 instead가 있으면 그게 답이다" 뭐, 이런 식이다. 물론, 김대균은 이런 꼼수보다는 정공법을 더 강조했다. 본인도 그렇게 정공법으로 영어공부를 했기에 지금의 베스트셀러 선생이 된 것이리라. (김선생님, 흑역사 같은 설명..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듯 그런 풍토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토익시험측에서 격달에 전년도 같은 달 문제를 뽑던 시험패턴들을 모두 바꾸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다시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고, 나의 식어버린 미쿡 사랑과 김대균의 꼼수가 절묘하게 어울려서 짧은 기간동안 나는 토익시험을 겁나 잔대가리 굴려가며 점수 올리기에 열을 냈다. 결국, 몇 차례 시험을 더 본 결과 내가 입사하기 직전에 받은 토익점수는 800점을 갓 넘긴 정도. 하지만, 그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를 들어갔다. 당시에는 IMF 상황에서 호전되어 높은 점수가 아니었음에도 다.행.히. 취업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발생하는데..(두둥) 신입사원 교육받을 때 각자 사무실로 직무 배치를 받으면 선배들에게 '매사에 긍정적,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라'고 세뇌교육을 시켜댔다. 하도 들어서인지 나도 사무실 배치 받고 눈에서 레이져 뿜으며 대기하고 있는데 사수로 배정된 선배가 물었다.
"OO씨 영어 잘하나?" 나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네, 잘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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