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고문 응대 시기
신입사원 교육받을 때 각자 사무실로 직무 배치를 받으면 선배들에게 '매사에 긍정적,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라'고 세뇌교육을 시켜댔다. 하도 들어서인지 나도 사무실 배치 받고 눈에서 레이져 뿜으며 대기하고 있는데 사수로 배정된 선배가 물었다.
"OO씨 영어 잘하나?" 나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네, 잘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잘 몰랐다. 회사에서 할 줄 안다고 하면 바로 현업에 투입되는지를. 주변 동기들 중에는 1년간 신입사원 교육을 여유롭게 받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나는 배치를 받은 다음날부터 독일업체와 진행 중이던 기술용역 업무에 투입된다. 첫 해에는 많은 일화가 있는데, '영어 잘하는 신입사원'인 나는 독일 엔지니어가 방문한 킥오프 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수가 갑자기 회의 중간에 조용히 내 귀에 캔디... 아니고 속삭였다. "OO씨 잘 듣고 회의록 정리해줘."
왓? 더F...
킥오프 회의는 오후 내내 진행되었고, 4시간의 회의 중에 절반 이상이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영어도 영어지만 업무가 익숙치 않은 상태에서 현업 전문용어들이 남발하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걸 신입사원인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나. 회의가 끝나자 외국 엔지니어들과 저녁식사 자리를 갖기로 한 모양이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어지럽고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저는 몸이 안 좋아서 못 갈 거 같습니다."라고 간신히 말하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점심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집에 돌아와서도 타이레놀을 먹은 채로 회의록 작성을 하면서 나는 왜 겁도 없이 영어를 잘한다고 말했을까.. 후회의 밤을 지새웠다.
회의록은 시작에 불과했고, 외국인과의 협업은 정말 살 떨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매번 내가 하는 말에 따라 업무의 범위가 결정되거나 책임 소지가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생겼고(생길까봐 걱정됐고..가 아니라 생겼고...임ㅠㅠ), 특히 계약서를 검토하는 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말, 처음 계약서를 읽는데 흔한 말로 검은 건 글씨요 하얀건 종이구나 싶었다... 아하하하하하
마지막 일화. 부품 소싱 업체 선정을 앞두고, 각 업체들이 제대로 검토 자료들을 주지 않자, 사수가 내게 추가 자료를 일정 내에 송부해달라는 다소 위협적인 메일을 쓰라고 지시했다. 위협의 핵심은 오늘까지 자료 안 주면 업체 선정에서 배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메일을 보낸 후 현지 출근시간이 되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윗사람들은 퇴근한 상태라 전화를 땡겨 받았다.'여보세요?'라고 하는데 영어다. 업체 선정 대상 중 하나인 해외 업체의 부사장이라고 했다. 바이스 프레지던트...
헬로 아이엠 솰라솰라.. 나, 바이스 프레지던트 어쩌구... 니 메일 잘 받았다... 자료 늦어서 미안하다.. 지금 바로 보내면 문제 없는거냐.. 긴장은 했지만 대충 뭐, 그런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 현지에서 전화 걸려온 게 당황스럽기도 했고, 책임질 사수나 윗 사람이 없는데 내가 부사장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해야하는 상황도 정말 싫었다. 나도 집에 갈걸.. (속으로 백만번을 외쳤다)
허나 영어신동이자 영어잘하는 신입사원인 내가 아닌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여유있는 척, 으흠? 아하? 오케이.. 해대며 이야기를 재확인한 후 이야기한 내용을 내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으니 메일로 다시 보내달라, 확인하고 문제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도 나름 긴박한 마음으로 걱정되어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한 것일텐데 내가 친절하고 여유롭게 대답하자, 상황이 험악하지는 않구나 싶은 마음에 한숨 돌린 눈치였다.
사실 좀 험악하게 굴었어야 했나 싶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항시 영어로 말할 때는 저자세에 친절모드가 탑재된 범생스타일의 대화법이 익은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기 직전, 기계적으로 나도 모르게 익숙한 문장을 내뱉었다. "thank you for calling." 그 말을 듣자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가, 전화기에 대고 크게 웃었다. "Hahahahahahahaha" 그러더니 내게 친절하지만 느린 말투로 "you. are. welcome"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다급한 마음에 전화를 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전화를 받는 한국 직원은 이제 막 영어회화에 입문한 새내기라고 느껴서인 듯 했다.. 전화기를 끊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땡큐포컬링이라니...
현재
그 외에도 혼자 이불킥, 혹은 머리를 쥐어뜯을 만한 일화들이 많이 있지만 더 하지는 않으련다. 요즘은 해외업체와의 기술 용역이나 고문이 방문하는 일은 드문드문 있는 편이다. 게다가 이또한 다 지나간다고, 그렇게 입사 초창기부터 하드 트레이닝을 받고 나니, 겁은 많이 없어졌고 팀에서도 그런 일에 끌려다니는 편이다. 영어를 못하는데 잘한다고 떠들어대면.. 이렇게 된다.
근데 겁이 없어진다는 것, 그리고 업무에 만성적으로 변하는 게 정신건강에는 좋긴 하지만 나쁜 점도 있다. 예전에는 문법이나 문장에 완벽하려고 노력은 했었는데, 대충 의사소통이 되는 수준만 유지하자는 게으른 마음이 커지면서 점점 영어가 콩글리쉬가 되어간다.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런 부분도 있겠고 예전에는 유창하게 잘 말하고 싶은 욕심이 강했다면 지금은 그저 업무적 책임소지나 회의록 상에 명확하게 정리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보니 '말 자체'를 잘 하고자 하는 마음은 안드로메다로 갔기 때문인 것 같다.
웃긴 건, 나름대로는 10년 넘게 영어에 헌신해왔는데 여전히 네이티브들은 내가 영어를 썩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얼마전 회식자리에서 파트장이 나를 소개하며 "영어를 잘하는 친구"라고 말했는데 해외업체 분의 표정이 묘했다. 나를 쳐다보며 속으로 "Do you?"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사실 이 글을 쓴 건 8-9년 전이고, 2년전에 해외 파견을 6개월을 다녀왔는데 그때도 해외 업체 직원과 이야기를 하는데 비슷한 경험을 했다. 동양인, 혹은 한국사람들은 예의상 자기를 낮추거나 자기 능력을 보잘 것 없다고 표현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대개 상대방은 아니라며 오히려 추켜세워주는 그런 훈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외국사람은 그런 빈말은 안 하는 편이다. 나는 상대방에게 매번 "내가 영어를 잘은 못하지만"이라는 말을 할 때가 있는데, 대부분 그들은 그 말에 수긍하는 듯 별 대답없이 내가 다음 말을 이어가길 기다리는 편이다. 이들에게 "아니야, 너 그만하면 잘해. 사실 나 좀 놀랐어.." 이런 주거니 받거니의 훈훈함을 기대할 수 없는 거다. 그때마다 나는 혼잣말을 되낸다. '그래도 쫌 하는 줄 알았는데, 얘네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나보네, 졸라 객관적인 놈들..')
내 영어공부기는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자기희화화이다.ㅋㅋㅋ 영어신동... 사실 무늬만 그런 거다. 10년간 영어를 했는데 중고등학교 때는 내신이니 입시 시험도 잘봤는데 정작 영어는 대체 뭘 잘한다는 건가. 그렇다고 영문학도 모르고 회화마저도 사비로 따로 공부해야 했고, 토익은 토익대로 꼼수로 공부하고. 평생 영어에 얽어매여 사는 것 같은데 이제는 자식들에게도 그짓을 강요하니. 참 웃기는 일이다.
한편으로 영어를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언어, 그 자체의 위치로 내려 놓자는 의견도 있다. 그냥 의사수단의 하나이지 않냐... 의사소통만 되면 되는거지 넘 열올려서 하지 말자는 말이다. 근데 내가 경험한 바대로,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와 직결된다.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예전 노트를 정리하다보면 영어공부 노트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때마다 머리 속이 참 복잡해진다. 이 길었던 영어공부의 길을 되돌아보다 보면 애증이 교차하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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