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편인데 그럴 때면 옛날 생각을 종종 한다. 이를테면 왜 그리도 앞선 세대 선배들은 일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우릴 그렇게 괴롭혔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그땐 어쨌거나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일상의 고통들을 감내했지만 이제와서 고백컨데 대부분 그들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기억으로 인해 마음 속엔 피해의식만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우리 세대의 직장인들은 다들 후배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선배를 믿지마라’, ‘회사를 믿지마라’, ‘최선을 다하지 마라’, ‘여기서 험한 꼴 당하고 썩지말고 더 좋은 곳을 찾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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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생각들에도 백래시가 있는 법일까. 돌이켜보면 직장 선배들을 포함한 내 인생의 몇몇 선배들에게 정말 분노만 남은건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가 잠시 곁가지로 새는 것 같지만 나는 요즘 옛날 일을 곰곰히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이를 먹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최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목사님 설교를 듣다보면 어느새 과거의 어떤 사건들을 떠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다. 아마도 설교 중에 목사님이 예화를 드는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비슷한 내 경험들, 그 장면들이 떠올랐다가 유체이탈된 채 다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영혼처럼, 설교 내용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내 기억들의 끝까지 복기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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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유로 어떤 논리나 법칙, 혹은 나름의 자성으로 정리된 사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고 길게 그 기억들을 늘여놓고는 다시금 이런 저런 생각들로 이미 정리했던 과거사들을 ‘보정’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이번에는 회사 선배들과의 기억들이 덩굴채로 떠올랐던 것이다. 헌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그렇게 분노가 차오르는 사건들이 아닌 비교적 훈훈하고 어떤 때는 따뜻하기도 한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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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연차 연구원시절 다짜고짜 회의실로 불러서는 ‘넌 기본이 안 되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버릇이 없다’는 훈계의 기억 뒤로는 퇴근길에 쭈뼛거리며 별 약속 없으면 술한잔하자며 맛집에 데려가서는 아까는 갈궈서 미안하다며 고기집에 가서 술 사주던 기억. 회사에서 노하우나 지식이 체계적이지 않던 시절 자기가 열심히 정리한 자료들을 빨리 익히라고 선뜻 내주던 노하우 가득한 파일들. 똑같은 월급쟁이들인데 커피나 밥은 선배가 사는 거라며 몇년 차이도 안나는 직급에도 매번 밥값 술값을 계산하던 실속없는 헛똑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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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 속에 각인된 괴로운 기억들이 사라진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들도 그들의 선배들에게, 회사라는 구조안에서 생존하고, 자리를 잡고 나아가 성공의 주역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했던 가혹한 기준의 옷을 입고 후배들에게 똑같이 입히려 했던 것 같다. 개중에는 정말 못된 인간들도 꽤 있었지만 선배들 대부분은 20대 중후반에 회사에 들어와서 우왕좌왕하며 그 선배들의 불호령에 억지로 적응하고 그 DNA를 하나의 룰로 여겨 후배들에게 전수하려던 어리고 미숙한 인간들이었던 것 같고, 그 와중에도 후배들에게 선배랍시고 형노릇 하려던 ‘가오반-애정반’의 꽤나 인간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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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도 달라졌다. 선배님 밥사주세요 하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말하게 됐다. 물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좀 헷갈릴 때가 있다. 여하튼, 도태되는 공룡은 멸종할테고 남는 건 기억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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